
1970년대 시흥동 판자촌에서 시작된 ‘전진상 공동체’의 따뜻한 이야기
서울 금천구 시흥동, 지금은 아파트와 상가가 들어선 평범한 동네이지만, 1970년대 이곳은 서울의 대표적인 판자촌이었습니다. 약 4만 명의 주민이 식수조차 제대로 공급받지 못하는 환경에서 살아가던 시절, 이곳에는 의료시설도, 복지시설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 척박한 땅 위에서 ‘의료사회복지’라는 씨앗이 싹텄고, 그 중심에는 바로 ‘전진상 공동체’가 있었습니다.
전진상 공동체의 시작: 벨기에에서 온 파란 눈의 의사
1975년, ‘전진상 공동체’는 작은 약국에서 출발했습니다. 이곳을 지켜온 대표적인 인물은 벨기에 출신의 의사 마리 헬렌 브라쇠르, 한국 이름으로 ‘배현정’ 원장입니다. 그녀는 “교회가 가난한 이들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김수환 추기경의 말씀에 감동받아, 자신의 인생을 시흥동에 바쳤습니다. 배 원장은 중앙대에서 의사 면허를 취득한 뒤, 최소희 약사, 유송자 사회복지사와 함께 이곳에 뿌리내렸습니다. 이후 김영자 간호사도 합류하며, 이들은 전문 분야를 넘나들며 한 팀이 되었습니다.
약국에서 복지관까지, 모두의 품이 된 공간
처음엔 약국 한 칸이 전부였습니다. 당시 판자촌의 주민들은 병원에 갈 엄두도 못 내는 경우가 많았고, 약국은 돈 없는 사람들이 쉽게 도움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습니다. ‘전진상’이라는 이름은 신자가 아니더라도 부담 없이 찾아올 수 있도록 지었고, 이 이름은 ‘온전한 자아 봉헌’, ‘참다운 사랑’, ‘끊임없는 기쁨’이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약국을 중심으로 의사, 간호사, 사회복지사는 조를 나눠 산동네를 직접 오르며 치료가 필요한 이들을 찾아다녔습니다. 판자촌의 알코올중독자, 조현병 환자 등 도움의 손길이 시급한 이들을 돌보며, 이들은 때로는 위험한 상황도 마주했습니다. 병을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이들을 보는 일이 반복됐지만, 이들은 결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가장 마음 아팠던 순간들, 그리고 희망의 기억
이들이 가장 힘들었던 것은 바로 아이들의 참담한 모습이었습니다. 판자촌 하수구 밑에서 발견된 여덟 살 소년의 주검, 엄동설한에 방치된 갓난아기 등 가난이 만든 비참한 현실이 날마다 펼쳐졌습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기적처럼 살아난 아이들이 있었습니다. 네 살 때 양잿물을 마셔 식도가 다 타버린 아이가 건강을 되찾고, 폐에 고름이 차서 심장이 밀려난 소녀가 가까스로 살아나는 등, 전진상 공동체의 헌신은 때때로 생명을 지켜내는 기적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살아난 아이들은 시간이 흘러 자신만의 가정을 꾸리고, 어버이날마다 고마운 마음을 전하며 공동체를 다시 찾기도 했습니다. 이 아이들의 성장은 전진상 구성원들에게 무엇보다 큰 보상이 되었습니다.
전진상 공동체의 특별한 복지 시스템
전진상 의원·복지관은 단순한 의료 지원을 넘어, ‘가계도’ 시스템을 도입해 3대에 걸친 가족의 상황을 상담실에서 꼼꼼히 기록하고 분석합니다. 의료적, 경제적 문제뿐만 아니라 가족력까지 살펴보고, 장학금 지원 등 다양한 후원을 연계합니다. 이 체계적인 접근 덕분에, 돈이 없어 치료를 포기하는 일이 없도록 돕고 있습니다.
새로운 약자와 변화하는 복지의 현장
시대가 변하면서 전진상 공동체의 역할도 달라지고 있습니다. 다문화가정, 가정폭력에 취약한 새로운 약자들이 늘어나고, 전진상 의원은 호스피스 기관으로서의 역할도 확장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대형병원에서도 의사들을 파견해 환자를 돌봤지만, 최근에는 전공의 파업과 구성원들의 고령화로 운영에 어려움이 많아졌습니다. 하지만 “어려운 사람을 돕는 정신만큼은 지속되길 바란다”는 마음으로 공동체는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전진상 공동체가 남긴 의미
‘전진상’은 45년 넘게 시흥동에서 묵묵히 이웃사랑을 실천해온 상징적인 공간입니다. 최근에는 현대자동차 설립자인 고 정세영 명예회장의 이름을 딴 ‘포니정 혁신상’을 수상하며, 그 의미와 가치를 다시 한 번 인정받았습니다.
마무리: 우리 곁의 작은 기적, 전진상 공동체
1970년대 아무것도 없던 시흥동 판자촌에서 시작된 전진상 공동체는, 지금도 “가난한 이웃 속으로 들어가라”는 정신을 지키며 소외된 이웃과 함께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진정한 나눔과 연대, 그리고 희망이 무엇인지 보여줍니다.
어쩌면 우리 동네에도 이런 ‘작은 기적’이 필요하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