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중소기업, 왜 성장을 멈추나? – ‘피터팬 증후군’의 진짜 이유와 정부 정책 변화
중소기업이 성장하면 좋은 일 아닌가요? 하지만 우리나라에선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최근 화학소재 중소기업 A사가 3년 연속 매출 1,000억 원을 넘기며 중견기업 자격을 얻었지만, 중소기업 ‘졸업 유예’를 택한 사례가 대표적입니다. 왜 많은 기업들이 일부러 성장을 늦추고, 중소기업 지위를 유지하려고 할까요? 오늘은 중소·중견기업 지원 정책의 현실과 변화 방향을 알기 쉽게 정리해봅니다.
중소기업, 중견기업, 대기업 기준은 어떻게 나뉘나?
먼저 기업 규모별 구분 기준을 간단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중소기업은 업종별 3년 평균 매출액과 자산총액(5,000억 미만 등)에 따라 정해지며, 중견기업은 이 기준을 넘어서지만 대기업 집단에 속하지 않은 기업입니다. 대기업은 자산총액 5조 원 이상 등 별도의 기준을 따릅니다. 즉, 매출이나 자산이 일정 기준을 넘으면 중소기업에서 중견기업, 그리고 대기업으로 ‘졸업’하게 됩니다.
중소기업 지원 혜택, 왜 이렇게 클까?
중소기업은 대한민국 경제의 뿌리로, 정부가 각종 세제·금융·입찰 등 다양한 혜택을 집중합니다.
- 세금: 법인세·지방세 감면, R&D(연구개발) 세액공제 우대(최대 25%)
- 금융: 저금리 정책자금, 중소기업 전용 융자·보증 지원
- 판로: 공공기관 우선구매, 중소기업 전용 입찰·수의계약 자격
- 인력: 청년인턴, 산업기능요원 등 인력지원 우대
특히 공공기관 입찰과 R&D 세액공제, 저금리 대출 등은 기업 성장에 큰 힘이 됩니다.
중견기업이 되면 뭐가 달라지나? – 혜택 급감, 규제 급증
문제는 기업이 성장해 중견기업이 되는 순간부터입니다. 중소기업 시절 누렸던 공공입찰, 수의계약, 세제 등 26개에 달하는 정부 지원이 대폭 줄어듭니다. 예를 들어 R&D 세액공제율은 중소기업 25%에서 중견기업 8~20%, 대기업 최대 2%로 확 줄어듭니다. 법인세 등도 단일세율 적용으로 바뀌고, 판로·금융 지원도 크게 줄어듭니다.
게다가 중견기업은 대기업과 달리 막강한 자본이나 네트워크가 없는 경우가 많아, 정부 지원 축소가 곧 경영 부담 증가로 이어집니다. 공공입찰 등에서 ‘중소기업 우대’가 사라져 매출에도 직접 타격이 생깁니다.
성장하면 오히려 규제·부담이 늘어난다?
실제로 한 기업이 중소기업을 졸업해 중견기업이 되면 적용받는 규제가 3배 이상 늘어난다는 조사 결과도 있습니다. 중견기업에서 대기업이 되면 규제가 40% 더 늘어나죠. 성장하면 할수록 정부 지원은 줄고, 규제는 늘어나는 구조가 되어버린 겁니다.
이런 이유로 최근 몇 년간 중견기업이 됐다가 다시 중소기업으로 돌아가는 기업이 급증했습니다. 2020년 274개에서 2023년 574개로 2배 넘게 늘어났죠. 기업 입장에선 “성공했으니 사업을 그만두라는 거냐”는 불만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왜 이런 정책이 만들어졌을까?
우리나라의 기업 지원·규제 정책은 ‘규모별 차등 지원’이 기본입니다. 중소기업에 혜택을 집중해 보호하는 대신, 일정 규모 이상 성장하면 ‘자립’을 요구하는 구조죠. 하지만 이는 단기적으로는 중소기업 보호에 효과적일지 몰라도, 기업들이 ‘성장’을 주저하게 만드는 부작용을 낳고 있습니다. 자산이나 매출이 기준을 조금 넘으면 오히려 지원이 뚝 끊기고, 각종 규제가 늘어나니 기업들은 일부러 규모를 키우지 않거나, 매출을 조절해 성장속도를 늦추는 일이 빈번해졌습니다. 이 현상을 경제학자들은 ‘피터팬 증후군’이라 부릅니다. 어른이 되기를 거부하는 피터팬처럼, 기업도 ‘중소기업’에 머물길 택하는 것이죠.
글로벌 경쟁력, 오히려 약화될 수도
문제는 이런 구조가 장기적으로 한국 기업의 글로벌 경쟁력을 떨어뜨릴 수 있다는 점입니다. 미국, 독일, 스웨덴 등 주요 선진국은 기업 규모에 따른 세제·규제 차별이 거의 없습니다. 모든 기업에 단일 세율을 적용하고, 규모와 상관없이 혁신이나 수출, 고용 창출에만 집중해서 지원합니다.
반면 한국에서는 성장 가능성이 높은 핵심 소재·부품·장비(소부장) 기업이나 미래 산업 분야 기업들이 글로벌 기업으로 도약할 동기를 잃고 있습니다. 실제로 최근 3년간 연 20% 이상 매출 증가를 이룬 고성장 기업 비중이 2009년 11.9%에서 2020년 4.6%로 급감했습니다. ‘오픈AI’ 같은 글로벌 슈퍼스타 기업이 나오기 어려운 이유 중 하나입니다.
정부 정책, 이제 어떻게 달라지나?
이런 문제의식에 따라 정부도 변화에 나서고 있습니다. 기존처럼 ‘중소기업=지원, 중견기업=축소’ 방식이 아니라, 앞으로는 투자, 연구개발(R&D), 인공지능(AI) 도입, 수출시장 개척 등 ‘성장’에 직접 도움이 되는 활동에 지원을 집중하겠다는 방침입니다. 기업이 실제로 성장할 수 있도록 경영 부담을 줄이고, 혁신기술 개발·글로벌 진출에 대한 지원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바꿀 예정입니다.
피터팬 증후군을 극복하고, 한국에서 세계적 기업이 더 많이 탄생하려면 기업 규모에 따라 혜택과 규제가 급격히 달라지는 구조부터 바뀌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앞으로 정부의 정책 변화가 실제 기업들의 성장 환경을 얼마나 개선할 수 있을지 주목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글이 중소기업·중견기업 정책의 현실과 변화 방향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셨길 바랍니다. 기업을 운영하시거나 창업을 고민하신다면, 이런 제도적 배경과 정책 변화를 꼭 체크해보시길 추천드립니다.